게임이 끝난 뒤에도 남아있는 것들ㅣ'단종 한국 게임, 다시 켜다',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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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 끝난 뒤에도 남아있는 것들ㅣ'단종 한국 게임, 다시 켜다', 국립중앙도서관

어느 날 온라인 게임의 하늘에 정체 모를 붉은 별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새로운 패치가 적용될 때마다 그 별은 조금씩 가까워졌고, 평소보다 공략하기 어려운 몬스터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유저들 사이에서는 게임 속 세계가 정말 종말을 맞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마침내 붉은 별이 스크린을 가득 채울 만큼 가까워진 날, 유저들은 한 언덕으로 모였습니다. 오랫동안 함께했던 세계의 끝을 같이 지켜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내 붉은 별이 세계를 뒤덮고 화면은 어둠으로 전환됐습니다. 그렇게 〈FINAL FANTASY XIV〉의 세계는 막을 내렸습니다.

〈FINAL FANTASY XIV〉 리뉴얼 전 기존 세계의 마지막을 담은 인게임 장면.해당 버전의 서비스는 종료됐지만 완전한 이별은 아니었다. 전면 리뉴얼을 앞두고 개발진이 기존 세계의 끝을 하나의 게임 속 사건으로 연출했으며, 이후 새로운 버전으로 다시 서비스를 시작했다. (출처: YouTube @GameNChick)

이 장면이 지금까지도 ‘게임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서버 종료’로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게임 하나가 끝난다는 것이 단순히 서비스가 종료되는 일만은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그 안에는 애정을 쏟아 키운 캐릭터가 있고, 다른 유저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있습니다. 그 세계를 만들기 위해 시행착오를 거듭한 개발자들의 시간도 함께 쌓여 있습니다. 오래전에 사라진 게임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그 안에 남은 사람들의 시간과 흔적을 다시 읽어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국립중앙도서관의  〈단종 한국 게임, 다시 켜다〉는 그렇게 게임이 사라진 뒤 남은 흔적을 다시 꺼내보는 전시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 〈단종 한국 게임, 다시 켜다〉 전시

게임을 알리는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직 나오지 않은 게임과 다음 업데이트, 앞으로 보여줄 스토리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늘 다음을 바라보는 일이 익숙해서인지, 이미 끝난 게임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오래전에 사라진 게임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그 궁금증을 안고 국립중앙도서관의 전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시작의 기록, 게임을 기억하는 단서

전시장에 들어서면 먼저 한국 게임이 처음 만들어지던 시기의 기록들이 펼쳐집니다.

국립중앙도서관 〈단종 한국 게임, 다시 켜다〉 전시장 진열대

전시의 연표는 1980년대 개인 개발자들이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던 시기부터 이어집니다. 지금처럼 게임 개발 환경이 갖춰져 있지 않았던 시절, 개발자들은 제한된 기술과 정보 속에서 직접 방법을 찾아가며 게임을 만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임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 있지 않거나, 실행 환경이 달라져 더 이상 플레이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게임 자체가 아닌 잡지와 패키지, 광고처럼 주변에 남은 자료를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해야 하는 것이죠.

한때 개발자들이 수많은 고민과 노력을 들여 완성했던 게임이, 이제는 잡지 속 몇 장의 이미지와 문장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전시 자료들을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게임챔프』 1993년 6월호

지금은 게임 하나를 둘러싸고 셀 수 없이 많은 양의 콘텐츠가 만들어집니다. 출시 전에는 게임을 알리기 위한 광고와 영상이, 출시 이후에는 유저들의 방송과 콘텐츠들이 온라인에 쌓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잡지의 단 한 페이지가 수십 년 전 게임을 기억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었습니다.

〈창세기전 외전2: 템페스트〉 패키지와 동봉 카드, 게임 서적 〈컴퓨터를 즐기는 도스게임 26가지〉

전시장에 놓인 〈컴퓨터를 즐기는 도스게임 26가지〉 같은 게임 서적은 당시 어떤 게임들이 존재했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소개됐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래된 게임 잡지는 새로운 게임 소식과 공략, 개발 관련 이야기를 담으며 당시 게임 문화를 기록했습니다. 캐릭터 일러스트와 연출을 강하게 내세웠던 국산 SRPG PC 게임 〈템페스트〉의 패키지와 카드, 게임이 담겨 있던 플로피디스크는 하나의 게임이 어떤 형태로 만들어지고 유통됐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됐습니다.

전시장에는 복원된 고전 게임을 직접 플레이해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었습니다. 투박한 조작기로 직접 플레이해보다 보니, 그 시절 사람들이 게임을 접하고 즐겼을 모습도 그려집니다.

Team Neo가 복각한 ‘재믹스 슈퍼 미니’와 한국 고전 게임 체험 공간. 남겨진 게임 자료와 복각 작업을 통해 과거의 게임을 오늘의 관람객이 다시 플레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지금처럼 수많은 유저가 온라인에 동시 접속해 플레이하는 방식이 익숙하지 않았던 시기. 친구와 게임을 함께 즐기기 위해서는 직접 만나 한자리에 모여야 했을 테고, 새로운 게임이나 공략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매달 발간되는 게임 잡지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을 겁니다. 게임에 필요한 페이지를 표시해두고 몇 번씩 다시 들여다보는 모습도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출시된 게임만 게임의 역사는 아니다

게임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세상에 나오지 못한 기획과 프로젝트가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처음의 기획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고, 오랫동안 준비한 프로젝트가 출시 전에 중단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개발 과정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시안과 빌드, 테스트물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금세 현업에서 잊혀져버리곤 합니다.

그래서 전시장에 남아 있는 미발매작의 기록이 더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당시에는 결과로 이어지지 못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자료들이, 시간이 흐른 지금은 오히려 그 시대의 게임 개발이 향하려 했던 방향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게임을 만들려고 했는지, 어떤 기술을 시도했는지, 왜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했는지. 남겨진 자료에는 당시 개발자들이 고민했던 선택과 가능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그날이 오면〉은 그런 기록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게임 잡지 『컴퓨터학습』에 실린 미출시 슈팅게임 〈그날이 오면〉 광고

국내 슈팅게임인 〈그날이 오면〉은 게임 잡지 광고와 기사에 등장하며 출시를 예고했지만 실제 발매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흥미로웠던 것은 정작 세상에 나오지 않은 게임을 지금 가장 선명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게임 자체가 아니라 광고 한 페이지라는 점이었습니다.

마케터의 눈에는 꽤 익숙한 형태의 자료입니다. 게임의 이미지를 고르고, 무엇을 강조할지 결정하고,  사람들에게 게임을 소개하기 위해 만들어진 광고입니다. 당시에는 철저히 ‘앞으로 나올 게임’을 알리기 위한 자료였을 겁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나자 역할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광고 속 화면과 문구는 당시 개발자들이 어떤 게임을 만들고자 했는지,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미발매작 〈승천대한〉을 소개한 전시 공간. 완성된 게임은 남지 않았지만, 당시 게임 잡지의 기사와 이미지가 어떤 게임을 만들고자 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개발자의 기억으로 남은 게임의 시간

게임의 기록은 문서와 자료로만 남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게임을 만들고 즐겼던 사람들의 기억과 증언 역시 그 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당시 현장을 겪었던 1세대 개발자들은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전시장 한편에서는 한국 1세대 게임 개발자인 홍동희 교수(계원예술대학교 겸임교수)의 인터뷰가 재생되고 있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단종 한국 게임, 다시 켜다〉 전시, 홍동희 교수의 인터뷰 영상

홍 교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지금은 너무 당연해서 의식하지 않는 개발 환경이 1990년대 초에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게임 엔진과 개발 도구가 충분히 갖춰져 있지 않았고, 필요한 기능을 개발자가 직접 만들어야 했습니다.

홍 교수는 IBM 본사의 테크니컬 매뉴얼 원서를 참고해 필요한 라이브러리를 직접 구현했다고 회상합니다. 매뉴얼에 코드가 준비되어 있던 것도 아닙니다. 회로도를 읽고 필요한 기능을 직접 만들었고, 문서에도 없는 정보는 프로그래머들끼리 나누며 해결 방법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저희가 라이브러리를 직접 구현을 해야 되는 거예요. 거기에는 일절 코드가 없어요. 단지 회로도만 있습니다.

홍 교수는 당시 개발 환경을 보여주는 사례로 〈원시소년 토시〉를 이야기합니다. 90년대 초 제작된 국산 액션 게임으로, 만화 IP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개발 당시에는 목이 긴 공룡 보스의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다관절 처리를 직접 구현했고, 화면에 다양한 변화를 주기 위해 여러 방식의 스크롤을 연구했습니다. 지금은 게임 엔진 안에서 익숙하게 접하는 기능들이지만, 당시에는 화면 속 움직임 하나를 위해 처음부터 방법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홍 교수는 그 시절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정말 코드 하나도 쥐어짜서 만들던 시대였기 때문에.
『게임정보』 1993년 1·2월호 수록 페이지

사실 처음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는 옛날 게임의 투박하고 단순한 그래픽이 먼저 보였습니다. 그런데 인터뷰를 듣고 같은 화면을 다시 보니 조금 다른 것이 보였습니다. 단순해 보였던 캐릭터의 움직임 하나에도 누군가 직접 해결해야 했던 문제가 있었고, 지금은 당연하게 사용하는 기능 하나도 당시에는 처음부터 답을 찾아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완성된 게임 화면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어떤 문제와 마주했고, 어떤 방법을 찾아냈는지. 무엇을 포기하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결과물만으로 모두 알기 어렵습니다.

사람의 기억은 남겨진 자료가 미처 담지 못한 부분을 채워줍니다. 게임의 역사는 남겨진 자료뿐 아니라, 그 게임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기억과 경험이 함께 기록될 때 더 선명해집니다.


게임을 만드는 사람에게 ‘기록’이 필요한 이유

전시를 보고 돌아온 뒤, 문득 이전 취재하며 찾아봤던 〈미르의 전설2〉 공식 가이드북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의 시선에서는 재미있는 대목이 꽤 많습니다. 당시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한 권장 사양은 Pentium III 600MHz, RAM 128MB. 지금 기준으로 보면 웃음이 나올 만큼 낮은 사양입니다.

2003년 5월 발간된 『미르의 전설2 공식 가이드북』 2003 개정판(제우미디어)

또하나 눈길이 가는 곳은 게임을 시작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페이지입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는 어디에 입력해야 하는지, 생년월일과 비밀번호 확인은 어느 칸에 적는지까지 화면의 항목 하나하나에 알파벳을 붙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003년 5월 발간된 『미르의 전설2 공식 가이드북』 2003 개정판(제우미디어)

지금은 ‘가이드’가 필요없을 만큼 당연해진 과정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페이지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새삼 느껴집니다. 지금은 익숙한 계정 생성과 온라인 게임 접속 자체가 당시에는 하나씩 설명이 필요할 만큼 새로운 경험이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책 역시 처음부터 당시의 게임 환경을 남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당시에는 그저 유저가 게임을 시작하고 더 잘 즐길 수 있도록 만든 실용적인 가이드북이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게임의 내용뿐 아니라 당시 어떤 컴퓨터로 게임을 했고, 온라인 게임을 어떤 방식으로 처음 접했는지까지 보여주는 기록이 되었습니다.

게임 잡지 『게임피아』의 부록 CD. 1999년 10월호(좌), 2001년 2월호(우)

전시장에서 본 잡지와 광고, 디스크도 같은 방식으로 시간을 건너왔습니다. 기록의 의미는 처음부터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른 뒤 새롭게 발견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빌드와 기획서, 콘셉트 아트, 출시를 위해 만든 이미지와 사용되지 않은 시안들. 지금은 하나의 게임을 만들고 알리기 위해 생겨나는 파일들이지만, 무엇이 30년 뒤 오늘의 게임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언젠가는 오늘의 게임과 우리가 무엇을 만들고자 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게임들은 훗날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지, 또 어떤 기록으로 읽힐지 궁금해지고, 또 조금은 기대하게 됩니다.

Exhibit

〈단종 한국 게임, 다시 켜다〉
기간: 2026.07.14 – 2026.12.31

Place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도서관 지하 3층 작은전시실

About

국립중앙도서관의 〈단종 한국 게임, 다시 켜다〉는 단종된 매체와 흩어진 기록 속에 남은 한국 게임의 흔적을 다시 살펴보는 전시입니다.

1980~90년대 게임 잡지와 광고, 패키지와 플로피디스크 등 당시의 자료를 통해 한국 게임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던 모습을 소개합니다. 실제로 발매되지 못했거나 오늘날 쉽게 플레이하기 어려운 게임의 기록도 함께 다루며, 복원된 고전 게임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습니다.

완성된 게임뿐 아니라 그 주변에 남은 기록과 개발자의 기억을 통해, 한 시대의 게임 문화와 개발의 시간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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