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역사 위에 더해진 상상력, 게임은 어떻게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어내는가
13세기 유럽. 절벽 끝에 선 한 남자가 허공으로 몸을 던진다. 곧이어 등 뒤의 날개가 펼쳐지고, 그는 성벽과 전장 위를 가로질러 날아간다.
물론 실제 13세기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인간이 고정된 날개를 이용해 비행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수백 년 뒤의 일이다. 19세기 영국의 조지 케일리는 날개의 구조를 연구하며 글라이더와 유인 비행기계를 설계했고, 1853년에 이르러서야 사람이 탑승하는 비행기계의 설계도가 나왔다.

게임 속 판타지는 완전히 무에서 시작되는 경우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을 조금 비틀면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 역사와 장소를 바탕으로 하되, 그 안에 존재하지 않았던 국가와 인물, 기술을 더하면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세계를 만드는 식이다.
〈나이트 크로우(NIGHT CROWS)〉가 재창조해낸 13세기 또한 그러하다. 중세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은 실제 역사에서 가져왔지만, 그 사이에는 가상의 국가 ‘신 트리에스테 공국’이 들어선다. 그리고 이 현실의 틈 위로 마법과 글라이더, 새로운 세력의 이야기가 쌓인다. 실제 역사와 게임 세계관이 사실상 같은 지도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나이트 크로우〉의 13세기는 어디까지가 실제 역사이고, 어디서부터 새롭게 만들어진 세계일까.
13세기, 〈나이트 크로우〉가 선택한 혼돈의 시대
〈나이트 크로우〉의 세계는 제4차 십자군 전쟁이 끝난 직후, 유럽에서 출발한다.
왜 하필 13세기였을까. 당시 유럽은 왕권과 교황권이 충돌하고, 기사와 귀족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며, 신앙은 결속의 힘이자 동시에 갈등의 불씨가 되던 시대였다. 십자군 전쟁과 종교 분쟁, 도시국가의 성장까지 정치·종교·경제의 질서가 동시에 요동치며, 여러 세력의 운명이 끊임없이 뒤바뀌던 시대였다.
〈나이트 크로우〉가 13세기 유럽을 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현실 자체가 충분히 복잡하고 극적이었던 시대였기에, 그 위에 가상의 국가와 새로운 세력의 역사를 덧붙이기 좋은 틀이 되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나이트 크로우〉의 세계관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실제 사건이 있다. '알비 십자군 전쟁.'
1209년부터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이어진 알비 십자군은 가톨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카타리파'를 대상으로 벌어진 전쟁이었다. 종교적 목적에서 시작됐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며 남프랑스의 정치 질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실제 역사와〈나이트 크로우〉의 역사가 갈라지기 시작한다.
중세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사이, 현실의 지도에는 없던 ‘신 트리에스테 공국’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공국의 권력을 잡은 인물이 게임 속 등장인물인 '브란트'다. 자신의 지위를 교황에게 인정받아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던 그는 실제 역사에서 벌어진 알비 십자군에 참전한다. 하지만 내전의 조짐이 보이자 군대를 돌리고, 교황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전쟁 지원금을 내기로 한다.

문제는 그 지원금을 마련할 자금이었다. 충분한 재정이 없었던 브란트는 결국 채굴권과 글라이더 전매권을 '밤까마귀 길드'에 넘긴다. 그리고 이 결정은 훗날 밤까마귀 길드가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실제 역사에서 벌어진 하나의 전쟁이 가상의 국가를 흔들고, 한 인물의 선택이 새로운 경제적 이해관계를 만들고, 다시 그것이 게임 속 주요 세력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나이트 크로우〉는 역사를 단순한 배경으로 가져오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이 사건이 이 세계에서도 실제로 벌어졌다면,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현실의 역사가 끝나는 자리에서 새로운 인과관계를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또 하나의 13세기를 만들어간다.
이단의 역사가 판타지가 될 때

알비 십자군이 〈나이트 크로우〉에 남긴 흔적은 전쟁만이 아니다. 그 전쟁의 주요 탄압 대상이었던 카타리파 역시 게임 속 세계관을 만드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카타리파는 중세 유럽에서 이단으로 탄압받았던 종교 집단이다. 이들은 인간의 영혼은 선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는 악에 가까운 곳이라고 믿었다.
낯설고 극단적으로 들리는 이 믿음은 〈나이트 크로우〉 안에서 '엘레메트 교단'이라는 판타지적 설정으로 다시 태어난다.
엘레메트 교단 역시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을 온전히 좋은 세계라고 믿지 않는다.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절대자의 선한 부분이 천국을 만들었고, 악한 부분이 지금의 현세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현실은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라기보다, 오히려 인간이 벗어나야 할 잘못된 세계에 가깝다.

이 설정을 알고 나면 엘레메트 교단의 행동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겉으로는 세상에 고통과 혼란을 가져오는 위험한 집단이지만, 적어도 그들 스스로는 파괴를 목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악이 만든 세계에서 사람들을 벗어나게 하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믿는다.
즉, 단순히 ‘악한 이단’ 하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실제 중세에 존재했던 사상의 핵심을 가져온 뒤, 그 믿음이 판타지 세계에서 실제 힘과 목적을 갖는다면 어떤 모습이 될지를 다시 상상한 것이다.
알비 십자군이 현실의 전쟁에서 가상의 정치사로 뻗어나갔다면, 카타리파는 현실의 종교 사상에서 판타지 세계의 교단으로 확장됐다. 〈나이트 크로우〉가 실제 역사를 활용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13세기 하늘에 글라이더를 띄우는 법
반대로 실제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나이트 크로우〉를 대표하게 된 것도 있다. 글라이더다.
인간이 하늘을 날고자 한 상상은 훨씬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15세기 후반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새의 날개를 닮은 여러 비행 장치를 구상하고 설계도를 남겼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종이 위의 아이디어에 가까웠다. 실제로 사람을 태운 글라이더 비행이 이루어진 것은 그보다 수백 년 뒤인 19세기에 이르러서다.

그런데 〈나이트 크로우〉에서는 그보다 약 600년 빠른 13세기에 사람들이 이미 하늘을 날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나이트 크로우〉가 이를 단순히 ‘판타지니까 가능한 일’로 남겨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신 현실의 13세기 위에 하나의 가상 역사를 덧붙여, 글라이더가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낸다.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유럽과 아랍 지역의 기술이 교류되고, 그 과정에서 아랍 기술자의 비행 기술이 전해졌다는 설정이다. 여기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재료 ‘모리온’이 더해지면서, 13세기에도 글라이더가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역사가 완성된다.
〈나이트 크로우〉가 추구하는 것은 완벽한 역사 재현도, 무엇이든 허용되는 판타지도 아니다. 실제 역사로 세계의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 안에서 판타지가 작동할 이유를 다시 만든다. 그 결과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있었을 법한 역사 하나가 만들어진다.
가장 자유롭지 않은 시대에서 자유를 말하다

사실 〈나이트 크로우〉의 중세가 현실과 달라지는 지점은, 마법이나 글라이더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바로 플레이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중세 사회에서 개인의 삶은 신분과 가문, 종교, 그리고 충성을 바쳐야 하는 주군과 분리될 수 없었다. 누구의 자녀로 태어났는지, 어떤 계급에 속했는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범위도 크게 달라졌다.
하지만 〈나이트 크로우〉의 플레이어는 가문의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성장하지 않는다. 대를 잇거나 주군에게 충성하기 위해 힘을 키우는 것도 아니다. 귀족 사회나 특정 종교에 자신을 묶어둘 필요도 없다.
대신 그 중심에는 ‘자신이 선택한 삶’이 있다.
밤까마귀 길드를 이끄는 단장 클레멘스 역시 정해진 질서에 사람들을 편입시키기보다,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아가려는 이들을 돕고 이끈다. 플레이어 역시 누군가가 정해준 운명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성장해간다.
이 균형은 시나리오 기획 단계에서도 중요하게 고려됐다. 시나리오 기획진은 〈나이트 크로우〉의 세계를 지나치게 환상적으로 만들거나, 반대로 중세라는 배경을 이유로 지나치게 음울하고 잔혹한 세계로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전쟁과 종교 갈등, 권력 다툼이라는 시대의 무게는 남겨두되, 그 안에서도 플레이어가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또 하나의 13세기에서, 더 넓은 세계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나이트 크로우〉의 13세기는 어디까지가 역사이고, 어디서부터 판타지일까.
알비 십자군이라는 실제 사건이 신 트리에스테의 정치와 밤까마귀 길드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카타리파의 사상은 엘레메트 교단이라는 새로운 믿음으로 변주된다. 현실에서 가져온 단서가 게임의 상상력과 만나면서, 우리가 알고 있던 13세기는 어느새 〈나이트 크로우〉만의 역사로 바뀌어간다. 역사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채우되, 그 세계를 지탱하는 현실의 기반은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그 세계의 이야기는 다음 장으로 이어진다.
차기작 〈나이트 크로우W〉는 〈나이트 크로우〉가 만들어온 세계를 이어받아, 그 무대와 이야기의 범위를 한층 넓혀간다. 우리가 알고 있던 13세기의 역사와 그 위에 쌓아 올린 상상은 또 어떤 장소와 인물, 새로운 관계로 이어질까.
그다음 페이지에서 더 넓게 펼쳐질 〈나이트 크로우〉의 세계를 기대해본다.